위대한 경제학자 폴 사무엘슨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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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52279   작성자 비회원   작성일 2009/12/14      조회 2   추천 : 0

폴 크루그먼이 케인즈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일컫는 위대한 경제학자 폴 사무엘슨이 눈을 감았다. 그는 MIT 경제학 산실의 대부였다.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경제학을 꼼꼼한 수학으로써 풀어낸 수리경제학의 국부이기도 했다. 그의 밑에서 수학한 수많은 위대한 경제학들이 미처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가운데에서 물론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들이 계속해서 배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손꼽아 보자. Mr. Solow as well as such other future Nobel laureates as George A. Akerlof, Robert F. Engle III, Lawrence R. Klein, Paul Krugman, Franco Modigliani, Robert C. Merton and Joseph E. Stiglitz. 등등이 있다.

 

사실 MIT 하면 공대만 떠올리는데 지금의 MIT 경제학과의 위상은 시카고대 경제학과와 그 쌍벽을 이루고 있다. 시카고대가 통화학파의 산실이라면 MIT는 그 반대되는 케인즈학파의 산실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러한 작금의 MIT 경제학과의 위상과 비중을 구축한 데에는 폴 사무엘슨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그 누구의 이견도 있을 수 없다.

 

지금은 '맨큐의 경제학'이 전 세계 대학 경제학과의 필수 기본 교과서로 요구되지만, 과거 1948년 폴 사무엘슨이 처음으로 펴낸 '경제학'은 향후 30여년 동안 전 세계 대학 경제학과의 필수 기본 교과서로 정착했었었다.

 

그는 그의 '경제학'을 통해 케인즈 이론을 공고히 구축하고 전 세계적으로 보급했다. 특히나 그는 미국의 다수의 대통령들에게 엄청난 경제학 이념의 영향력을 미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케네디 대통령이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는 케네디 경제 태스트 포스의 수장이었고 수시로 케네디와 독대를 하며 케네디 정권의 경제학적 이념과 정책의 뼈대와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정책 수립을 세웠었다.

 

그는 케네디로부터 제1순위로서 chairman of the Council of Economic Advisers를 제안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그 이유는 그는 공직에 얽매여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할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소신껏 정권의 구애와 자신의 공직자로서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외치고 싶다고 케네디에게 당당히 그 제안의 거절 이유를 밝히기도 했었다.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소신을 가장 정확히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어보겠다. 잘 아시다시피 시카고 경제학파, 즉 통화학파의 대부는 밀턴 프리드먼이다. 폴 사무엘슨은 아이러니하게도 1935년 시카고 대학 경제학부에서 학위를 받고 곧바로 대학원은 하버드대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케인즈의 이념과 아이디어를 유일무이하게 미국에서 제대로 가르치는 Alvin Hansen 교수에게 사사받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가 밀턴 프리드먼의 주도하에 통화학파를 점차 확고히 구축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정신분열증과 같은 짓거리"라며 과감히 그리고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 사실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소신은 확고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사받은 폴 크루그먼이 지금 이 세대에서 거침없이 미국의 대통령에게뿐만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각국을 상대로 제 소신껏 독설과 비판을 서슴치 않는 사실에서도 폴 사무엘슨의 학자로서의 대쪽같은 성품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지만 하버드대에서 둥지를 트지 않고 MIT의 초청을 받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사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당시 미국 하버드 경제학과의 상황은 유태인이거나 케인즈주의자거나 아주 매우 똑똑하고 유능하고 독창적인 사람이라면 사실상 교수자리를 취득하기가 99% 불가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폴 사무엘슨은 유태인이고 케인즈주의자였다. 거기다가 그는 시카고대 통화학파를 향해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서슴치 않는 독설을 퍼붓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하버드대에서는 그에 대해서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MIT대로 건너가 지금의 위상과 비중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더 재밌는 사실은 그는 밀턴 프리드먼과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지만 둘만의 찐한 우정을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밀턴 프리드먼이 시카고대 경제학 대학원에 재직할 당시 그는 시카고대 경제학 학부생이었다. 폴 사무엘슨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그는 밀턴 프리드먼과 단 한 가지 의견도 동의를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희한하게 우정을 간직한다. 극과 극은 어쩌면 서로 더 잘 통한다고 하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더 많은 에피소드와 그에 관한 일화를 말하고 싶지만 이만 줄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그를 단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일화를 전하면서 말이다. 그는 항상, 늘 언제나 그가 가르치는 MIT대 경제학 학생들에게 한결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이 자신의 정치판 동료들에게 늘 당부한 것과 같은 말이다.

 

“have much to be humble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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