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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최근 독일에서 도입된 패트리엇(PAC-2) 미사일이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행사 때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3일 복수의 군 소식통에 따르면 군 당국은 다음 달 1일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인근에서 진행되는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 때 패트리엇 미사일을 공개하기로 했다.
군 소식통은 “우리 군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을 확보했음을 국민에게 알리는 한편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앞두고 대북억지력 강화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노후한 나이키 미사일을 대체하기 위해 약 1조 원을 들여 도입한 패트리엇 미사일은 유사시 북한이 발사한 스커드 미사일이나 북한군 항공기를 10km 안팎의 고도에서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군 당국은 48기의 발사대와 미사일, 통제장비로 이뤄진 2개 대대 규모의 패트리엇 미사일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한편 1일 시가행진에는 사거리 278km의 공대지미사일(SLAM-ER)과 국산 대공미사일 천마, 자주대공포인 비호와 함께 실전배치를 앞두고 있는 차기전차(XK2), 차기보병 장갑차(K-21) 등 24종 86대의 장비도 공개될 예정이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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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복수의 군 소식통에 따르면 군 당국은 다음 달 1일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인근에서 진행되는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 때 패트리엇 미사일을 공개하기로 했다.
군 소식통은 “우리 군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을 확보했음을 국민에게 알리는 한편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앞두고 대북억지력 강화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노후한 나이키 미사일을 대체하기 위해 약 1조 원을 들여 도입한 패트리엇 미사일은 유사시 북한이 발사한 스커드 미사일이나 북한군 항공기를 10km 안팎의 고도에서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군 당국은 48기의 발사대와 미사일, 통제장비로 이뤄진 2개 대대 규모의 패트리엇 미사일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한편 1일 시가행진에는 사거리 278km의 공대지미사일(SLAM-ER)과 국산 대공미사일 천마, 자주대공포인 비호와 함께 실전배치를 앞두고 있는 차기전차(XK2), 차기보병 장갑차(K-21) 등 24종 86대의 장비도 공개될 예정이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2008.09.24 19:51:19
북한강에서님 좋은소식 올려주셔 감사합니다
식전행사 제대로하니 감개무량 합니다
정권바뀌니 건군60주녕 행사도 제대로 치루는군요
대한민국 국군장병 화이팅 !!!
선진미래연대 화이팅 !!!
식전행사 제대로하니 감개무량 합니다
정권바뀌니 건군60주녕 행사도 제대로 치루는군요
대한민국 국군장병 화이팅 !!!
선진미래연대 화이팅 !!!
2008.09.24 20:26:59
얼마만인가요 국군의날 행사~~~
이제사 나라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거 같습니다...
그날의 멋진행사 ....생각만해도 설레이네요...
대한민국 국군 화이팅!!!!
이제사 나라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거 같습니다...
그날의 멋진행사 ....생각만해도 설레이네요...
대한민국 국군 화이팅!!!!
2008.09.24 21:10:24
| 맨 주먹으로 시작, 세계 9위의 군사력 확보 2008년은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된 지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1948년 8월15일 건국 당시 국군의 군사역량은 한 마디로 맨 주먹이나 다름없었다. 육군은 이렇다 할 장비 없이 8개 사단 병력규모로 출발했고, 해군은 소해정 몇 정만을 보유하고 장교와 조병들이 ‘함정건조기금모금운동’을 벌였다. 공군은 조종사 10명과 20대 L형 경(輕)항공기를 갖고 출범했다. 60여년이 지난 2007년 미(美) CIA의 ‘2007세계군사력보고서’에는 세계 군사력 합계순위 발표에서 한국의 지상군 전력은 세계 4위(병력 56만), 해군 전력 세계 8위(병력 6만7천), 공군전력 세계 8위(병력 6만천), 군사비 규모 세계 8위, 종합순위 세계 9위(북한 18위)를 기록했다. 이에 본지는 이순(耳順)을 맞은 국군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 ||||||||
일각에서는 국군의 정통성을 대한제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역사 단절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태어난 신생독립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군의 시원(始原)은 ‘조선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이하 경비대)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가을 미(美)군정 당국은 해방 정국의 치안 유지와 난립하는 사설 군사 단체로 인한 불안을 해소키 위해 경찰을 포함하는 한국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했다. 이에 1945년 11월13일 군정법령 제28호가 공포됐고 ‘국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군(軍) 창설 준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군정은 급선무였던 기간요원 양성을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1945년 12월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5월1일 그 후신인 ‘경비사관학교’가 설치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건군 주역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됨에 따라 미국은 한국국방군 창설 계획을 보류시키게 된다. 이에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당면한 치안 유지를 위해 점령군 사령관 재량 하에 소위 ‘뱀부계획’(Bamboo Plan)을 수립, 규모를 줄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해 1946년 1월15일 ‘Korean Constabulary’(조선국방경비대)가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 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대전·이리·광주·부산·대구·청주·춘천에 2연대~8연대까지 창설되고 11월16일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됨에 따라 9연대가 창설됐다. 경비대는 1947년부터 본격적인 증편이 이뤄져 정부 수립 때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증강돼 규모의 군대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 (2006년 1월5일자 국방일보 참고) | ||||||||
이 과정에서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해 중견(中堅)간부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도 했는데, 1950년대 말까지 10,000여 명이 미 군사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8월15일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政府)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됨에 따라 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됐으며, 경비대에 입대하지 않은 광복군·일본군·만주군 군사경력자들과 남북한의 순수 민간인 출신들이 대거 입대했다. (정부 수립으로 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편되고,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육군에서 분리 독립함으로써 현대적인 3군 체제로 정립됐다.) 이와 함께 1948년 11월에는 국군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함에 따라 같은 해 12월15일 국방부에는 참모총장, 육군본부에는 총참모장과 참모부장을 보직하게 되어 초대 육군총참모장에는 이응준 준장, 참모부장에는 정일권 대령이 각각 임명됐다. 또한 1948년 12월에는 병과제도(兵科制度)를 창설, 보병·포병·기갑·통신·항공·병참 ·경리·감찰·군의·헌병 등으로 구분하고 일반 참모제를 제정하는 한편 1949년 5월에는 국방부 참모총장제를 폐지하고 육·해군의 지휘를 국방부 장관(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이 관장토록 했다. 이와 함께 육군은 편제상 종전의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제7·8사단을 추가로 창설했으며,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호국군(護國軍)및 각 지구 병사구 사령부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1950년 6·25 직전까지 육군의 총병력은 8개 사단 9만5천여 명에 달하게 됐다. 그러나 창군 과정에서 군내에 잠입한 공산주의자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허위선전과 모략으로 부대 내 좌익세력들과 함께 폭동을 획책했다. 이러한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1948년에 제주4·3사건을 시작으로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사건 등이 터졌다. 이에 군은 미처 자체조직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폭동진압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군내 자체정화를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단행, 1948년 10월~6·25 전쟁직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1,300여 명에 달하는 불순분자를 색출했다. 6.25 발발, 반공정신으로 뭉친 국민 입대 쇄도 이런 가운데 북한은 6·25 남침을 앞두고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따라 유격대를 침투시켜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구에서 잔존공비와 합세, 후방을 교란시켰고 1950년도 초부터는 38선상에서 빈번히 무력충돌을 야기시켰다. 이에 군은 태백산·지리산 및 호남지구에 공비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했으나 미처 작전을 종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6·25남침을 당하게 됐다. 전쟁 발발 전 남북 간의 군사력 격차는 현저했다. 남한은 일반 병력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기계화·특수부대를 망라한 19만8000여 명이었다. 국군은 전차가 1대도 없었고 인민군은 242대나 됐다. 연습·연락기만 22대였던 국군과 달리 인민군은 전투기·전폭기 등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저한 전력 격차 속에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반공(反共)정신으로 뭉친 국민들의 입대가 쇄도했다. 7월 초 바로 학도의용군 약 30여만 명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 중에는 여자 학도의용군 심지어 재일교포 학도의용군도 있었다. 소년지원병 3,000여 명이 낙동강으로 달려가 분전했고, 만 17~40세의 장정 30만 명이 국민방위군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메운 카투사(KATUSA) 장병 4만3천여 명이 미군과 함께 장진호·군우리·펀치볼 등의 전선을 누볐다. 지게부대인 한국노무단(KSC) 30여만 명은 전선의 보급대원이 됐다. 국군과 UN군 통제 하에서 유격부대도 운용됐는데, 호림부대를 비롯, 명·백봉부대, 백골병단, 동키부대와 울프팩 예하의 유격부대, 그리고 제8240·8250부대 등이 그들이었다. | ||||||||
여자 의용군이나 일반 주민들도 무장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전세의 전환은 UN군의 참전으로 이뤄졌다. 국제적 연대에 의한 연합전력은 적어도 전선의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고, 바로 국군의 전투력 증강으로 연결됐다. 한편, 미국은 ‘밴 플리트 계획’으로 명명된 국군 확장계획을 클라크(Mark W. Clark, 前 UN군 총사령관)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PF·PT·PCS·LSSL) 50척을, 공군은 F-51 무스탕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국군 정원이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했다. 이와 함께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 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대장)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총본부를 창설해 육군의 군 구조를 정비했다. 이로써 19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 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6.25 전쟁기간 동안 국군은 창군요원의 29%를 포함, 25만 7천여 명의 희생을 통해 국가를 수호했으며,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작전 수행 시 북한주민의 약 절반인 400만 명이 국군을 따라 피난길에 나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정통정부’ 임을 입증했다. | ||||||||
특히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가운데서도 국군은 수백 만 명에 달하는 북한피난민의 보호활동을 전개하면서 군 철수작전 수행에 지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북한피난민을 흥남부두에서 10만여 명, 성진부두에서 1만여 명을 군 수송선에 태워 철수시켰다. 또한 해군은 미리 확보해 둔 백령도·명천양도 등지를 근거로 서해안에서 6만여 명, 동해안에서 수만 여 명의 피난민 구출작전을 전개해 국군이 ‘국민의 군대’임을 입증했다. 참고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총 병력동원 수 5백76만 4천1백43명, 전사자 3만 3천6백67명, 기타 사망 3천2백49명, 부상자 10만 3천2백84명이었다. (1998년판 뉴욕타임스 발행 「WORLD ALMANAC」참고) 6.25전쟁 이후 줄곧 전투력의 증강 및 정비에 총력을 경주하던 국군은 1964년 9월, 베트남 정세가 극도로 악화되자, 지원군으로서 베트남에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한 데 이어 1965년 2월에는 공병 및 수송부대를 증파, 그 통상명칭을 ‘비둘기 부대’라 호칭하고 사이공에는 주월 한국군사원조단을 설치했다. 1965년 10월에는 전투사단으로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견하고, 연이어 1966년 9월에는 제9사단(백마부대)을 증파했으며, 이로써 파월병력이 5만여 명에 다다라 종전의 주월 한국 군사원조단은 주월 한국군사령부로 개편됐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창군 이래 최초의 해외원정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과 함께 자유진영의 공동 방어전선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4,000여 명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국군은 참전 기간 중 총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부대 작전을 전개, 적 사살 4만1,000명이라는 전과를 거두었다. | ||||||||
한편, 국군은 1965년도에 이르러 현대전에 적응한 제222방공포병 ‘나이키 유도탄 대대’를 창설했고 1966년도에는 정훈병과를 창설해 정신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1970년대는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1971년 초 주한 미 제7사단이 철수, 휴전선 방어를 국군이 전담하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다음해인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병행해 7·4공동성명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남북대화 중에도 북한은 남침땅굴을 굴설해 1974년도에 최초 땅굴이, 1975·78·90년도에 제2·3·4땅굴이 계속 발견되어 세계를 경악케 했으며, 수많은 침투도발과 함께 1976년 8월에는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켜 전쟁발발 일보직전 까지 이르게 했다. 이 같은 북한의 도발 위협 속에서 박정희 전(前) 대통령은 70년대 초부터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3년 베트남 철수와 함께 북한 기갑부대 운용양상에 대처하고 부대구조의 기계화·기동화 필요성에 부응해 1개 기계화 보병사단을 창설했다. 또한 1974년부터 1981년을 목표년도로 한 ‘제1차 율곡계획’(戰力增强事業)에 착수해 후방사단의 전력화, 전방사단의 4각 편제개편, 개인화기의 전면교체, 예비사단 포병부대의 증·창설, 육군항공전력의 대폭증강 등 획기적인 전력증강으로 자주(自主)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아울러 방위산업 분야에서 소화기는 물론 각종 공용화기와 대구경화포의 생산과 장갑차·전차 등을 자체 개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1978년도에는 중·장거리 유도탄과 다연장로켓의 개발에 성공했다. 이와 함께 국군은 1973년 7월 제3군사령부를 창설했으며, 1975년에는 현전선 고수개념(固守槪念)을 설정, 경인지역 방어사령부를 수도군단으로 개편하고, 4개 훈련단을 창설했다. | ||||||||
특히 자유 베트남 패망에 자극되어 1976년 부터 ‘팀스피리트 한미연합 훈련’을 시작해 매년 그 규모를 확대 실시했으며, 1978년 11월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를 발족시켜 한미관계를 안보협력의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군은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 ‘미얀마 아웅산 암살 폭파사건’, 1987년 11월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등 거듭되는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보루(堡壘)로서 그 사명을 다해 적(敵) 도발을 억제하고 안정과 번영을 보장함으로써 ‘86 아시안 게임’과 ‘제24회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가능케 했다. 아울러 군은 자주 국방력 강화에 더욱 주력해 ‘공세적 방위전략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기초로 강력한 전력 확보에 주력해 명실 공히 자주적 지상전투 태세를 확립했다. 그리고 1981년 5월에는 육군 교육사령부를 창설해 한국적 교리 개발과 미래 지향적인 전투발전 업무를 전담케 하는 한편 지휘체계를 재정비했다. 또한 1989년도에는 육군본부를 지세적 요충지(要衝地)인 계룡대지역으로 이동해 전략적 이점을 배가시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방위력 개선 목표달성 및 즉응전력을 강화하고 주요부대를 개편해 단위부대 전력을 향상시켰으며, 합동참모부의 통합작전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명실 공히 자주국방태세를 완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자유 베트남의 패망과 함께 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한동안 국군의 해외 파병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이에 대한 미국의 반격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18년 만에 국군의 해외 파병이 다시금 논의되기 시작했다. UN 결의에 의한 다국적군이 구성되고 전후 복구 사업 참여를 위해 참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자 비전투병 파병을 조건으로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1991년 1월부터 4월까지 의료지원단 154명과 공군수송단 160명(수송기 5대) 등 비전투 요원 314명이 쿠웨이트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파견됐다. 다시금 국군이 해외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국군은 또 1991년 9월 UN가입과 함께 UN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게 된다. 국군은 1993년 7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상록수부대(공병대대)를 파견, PKO에 처음 참여한 이후 10여 년 동안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UN과 국제 사회의 노력에 적극 동참해 왔다. | ||||||||
국군 최초로 PKO에 참여한 상록수부대는 1993년 7월30일 현지에 도착한 이래 연인원 540여 명의 병력을 투입, 현지 UN평화유지군(PKF)사령부가 부여한 도로 보수 공사 임무와 주민 지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상록수 부대원들이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사랑의 학교와 기술학교를 운영, 한국인의 박애(博愛)정신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런 성과를 발판으로 국군운 1994년 9월 서부사하라 의료지원단 파견에 이어 1994년 10월 그루지야 정전감시단 참가, 1994년 11월 인도·파키스탄 정전감시단 참가, 1995년 10월 앙골라 공병대대 파견 등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PKO에 참가하게 됐다. 이러한 국군 PKO 활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사상 처음으로 국군 장성이 2002년 1월 UN평화유지군 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1999년 9월7일 UN 감시 아래 주민 투표를 실시한 결과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자 친(親)인도네시아 계열의 민병대들이 유혈 폭력 사태를 유발, 혼란이 발생했다. 1999년 9월15일 UN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은 같은 해 10월 육군특수전사령부 병력을 주축으로 한 보병부대(상록수부대)를 파병했다. 1973년 3월 베트남 철수 이후 26년 만에 전투병 파병이 이뤄진 것이다. 이로써 국군의 PKO는 명실 공히 질적·양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파병된 한국군은 2003년 10월까지 주둔하는 동안 책임 지역을 완벽히 통제하는 등 치안 유지에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나아가 상록수 부대원들은 의료 지원·영화 상영·이발·농기구 수리 등 여러 기능을 통합한 민사 작전인 ‘푸른 천사’(Blue Angel) 작전을 실시, 현지 주민들로부터 ‘다국적군의 왕(王)’으로 평가받는 등 두터운 신뢰를 받기도 했다. 국군은 또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 국제 연대에 동참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한미동맹 관계의 공고한 발전을 위해 2002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2003년부터 이라크에 병력을 파견해 국위(國威)를 선양(宣揚)하고 있다.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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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통수권자로서 위풍당당하고 자상하게 사열하시는 이대통령님의 모습이 기대됩니다.
식후행사로 여자댄스그룹 위문공연이 있는데요.
원더걸스가 출연한다고 합니다.
원더걸스 팬들이 구경가자고 난리가 났다네요~~~~~~
원더걸스가 화천 군부대에서도 위문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요.
착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얼굴만 이쁜 줄 알았더니만 맘씨들도 이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