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偶像)과 망령(亡靈)
한국학부모신문 수석편집위원 권 녕 하
유령(幽靈)이 우리 주변을 활개치고 다니고 있으나 그것을 뚜렷이 보고 있는 것은 적은 수의 사람 뿐이다. 그것은 한 때의 공산주의(共産主義)나 파시즘의 망령이 아니라 새로운 유령이다.
위 글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의 모두(冒頭) 문장이다.
우상(偶像)은 사전적 의미로 ‘나무, 돌, 쇠붙이 따위로 신불을 본떠 만들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거나, 대중적인 인기가 있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상’을 뜻한다. 망령(亡靈)은 ‘죽은 사람의 영혼,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라고 풀이 되어 있다.
우리네 속담에 “귀신(鬼神) 중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생(生)귀신”이란 말이 있다. 죽은 귀신의 위력보다 ‘살아서 돌아다니며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인간)’의 위력이 더 겁이 난다는 말일 것이다. ‘이 귀신은 죽지도 않아~’ 하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상 중에서도 가장 폐해가 큰 우상은 ‘이데올로기 우상’ 이다. 이 우상은 ‘종교도 아닌 것이 종교’인양, 전 세계로 전파되더니, 전파된 나라마다 ‘민중의 아편’ 같이 ‘증오심’을 독소로 퍼뜨리며, 그 폐해를 백일하에 노출시킨 끝에 자멸하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성된 수 많은 망령 중 하나가 아직 죽지도 않고 생(生)귀신처럼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미 죽어버린, 죽은 귀신이 돼버린, 망령에 대한 숭배가 미신숭배를 뺨 칠 정도로 열정적인데, 그야말로 ‘치졸함과 절망의 극치’다. 어처구니 없는 이러한 현상이 백일하에, 현실상황으로 나타나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나라, 대한민국이다.
역사(歷史)가 정사선악(正邪善惡)을 결정한다는 것이 ‘스탈린 주의’다. 그의 그러한 생각이나 신조에는 ‘미래’ ‘후세’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깔려 있고, 왜곡된 인식은 우상숭배 개념과 흡사하다. 또한, 이 왜곡된 우상숭배 개념에는 피동적(被動的)인 사고방식과 절망감과 무력감이 교묘하게 위장(僞裝)돼 있다.
이같이 위장된 절망감, 피동적 사고방식은 종종 선동주의자나 모험주의, 현실의 무시, 어거지를 피우는 형태로 그 절망감이 표출된다. 이러한 심리 기전은 사이비 교주, 폭동 지도자, 테러리스트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예 : 표결 결과) 아래서도 패배보다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인간을 경멸한다. 요즘에는 이 사이비 급진 -진정한 진보가 아닌- 성향으로 위장한, ‘절망’과 ‘니힐리즘’이 젊은 세대 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이고 깨어있는-유능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 성향으로 오인되도록, 부추기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그들의 성향은 한층 대담하고, 조직적이며, 헌신적 행동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인식 감각의 결핍과 장기적 전략 감각의 부족 혹은 오판으로, 그리고 인류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생명에 대한 경외감, 조건 없는 사랑 등을 외면하는 그들의 성향으로 인하여, 결국 다수 대중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적인 현실상황이다(에리히 프롬 -일부분 차, 인용).
이와 같이, 대중에게서 외면받는 현상은 예정된 수순이며 필연적 결과이고, 그들의 말을 빌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다음에 보여주는 두 장의 그림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실제상황이다. 이 결과 또한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그림 1 : 진실로, 자연환경 보전에 진정(眞情)이 있고, 그렇게 보전한 자연환경을, 온전하게 후세에 물려주고자 한다면 -힘이 다소 부치고, 당대(當代)에 손해가 나더라도- 현재, 도시문명의 하수구로 전락해버린 강(江) 하구의 준설 및 생태복원을 위한 일에 사심 없이 접근해야 한다. 장마철 막혀버린 하수구가 자신의 집 현관 앞이라면, 당장 치울 것이다. 게을리 하거나 혹은 지체해서 여름 한 철 악취라도 풍긴다면- 전염병 발생, 이웃 주민의 항의 등에 잠시라도 지체할 수나 있겠는가. 매년 장마는 빠짐없이 닥쳐오고 홍수는 연례행사처럼 빈발하는데, 그동안 역대 정권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홍수 뒤처리나 했지, 강변과 강 하구를 정비하는 근본대책을 외면해 왔다. 그 결과 토사는 쌓이고 싸여, 이젠 강 하구는 수심이 1m도 채 안 되는 지경으로 변해버렸다. 이제와서 작은 쪽배 한 척도 떠 다닐 수 없는 강을 과연 강이라고 할 수나 있겠는가. 이 지경이 되도록 생태보전이다, 환경친화다 하고 부르짖던 그 많은 00사회단체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에게 지출된 국가예산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국가예산을 관, 항, 목에 맞게 집행했나. 더 말하기도 부끄럽기는~.
작금의 상황은, 종교단체를 등에 업은 망령 추종세력들의 반대 여론에 휩쓸려, 논의의 핵심 주제조차 거리로 내 몰린 채 난도질 당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손 대지 않으면, 2~30년 뒤 -현재의 위정자들은 다 죽고 난 다음이겠지만- 강은 썩어 갈 것이고, 하구둑 밖의 그나마 여지껏 근근이 버텨 오던 항구와 갯벌도, 오염된 토사의 영향권에 들어가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 자명하다. 이렇게 미구에 닥쳐올 현실을 꼭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확인시켜줘야 위급상황을 긍정하겠다는 것인가. 어리석고 어린 백성들이여~.
원인은, 4대강 하구에 하구둑이 건설되고 제방 위로는 도로가 연결되고, 경제개발 및 발전단계에서 내륙의 물류(物流)와 교통이 자동차 중심으로 치우친 결과지만, 그렇다고 경제개발 및 발전까지 탓하거나 반대하면서까지 환경보전만을 최상의 덕목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육식과 살생을 금한 성현의 말씀은 오늘날에 와서도 금과옥조(金科玉條)다. 그러나 인류 생존에 유익한 살생(殺生)은 군자지도(君子之道)다. 망가지고 있는 현재의 자연(自然)이 아니라 인류 생존에 유익한 상황에서, 가장 자연(自然) 친화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고자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 같은 노력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임을 부인해선 아니 된다.
환경보전, 생태복원, 무공해, 청정수역--- 아쉬움이 어디 한 두 가지겠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접점, 강 하구는 전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물산의 집산지로 -기원전부터-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현인류의 생활 터전이었지 아니한가. 다 망가진 지금, 이제와서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을 죽기 전에 보고 싶다면~ 망발일까. 더 늦기 전에~, 누가 해도 해야 할 일, 더 이상 늦출 일이 아니다.
그림 2 : 청정해역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성장한 물고기를 자연산이라고 해도 될까. 산에다 뿌린 인삼 씨앗이 자라나면 산삼이 될까. 결론은 둘 다 아니다.
자연산이라 함은 첫째 : 뛰고 날고 헤엄치는 공간에 울타리가 없다. 둘째 : 먹이에 사육당하지 않는다. 셋째 :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넷째 : 경쟁과 고난은 일상다반사다. 다섯째 : 하늘과 땅, 자연의 질서에 순응한다. 이 정도만 봐도 양식장의 광어, 우럭은 자연산이 분명 아니다. 두메산골 농장의 녹용도 자연산이 아니다. 한정된 공간에서 뛰어다닐지라도 -인공부화했을지 모르지만- 차라리, 토종닭이 자연산에 가깝다(필자는 30년 살았다는 닭을 본 적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도, 정자(精子)부터 경쟁한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경쟁한 결과물이 현존재인 것이다. 경쟁 없는 사회는 퇴보한다. 경쟁은 ‘희망’의 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에서도 -가두리 양식장처럼- 교류를 가로막는 제도와 사회적 압력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품에서 뛰어다녀 본들 사육된 존재에 불과한 것.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고~ 아무리 고상하고 현학적인 명언 명구를 외우고 외쳐봐도 울타리 밖의 세상에선 낯설고 공허하다.
문학 장르 중에서 ‘수필’ 장르가 있다. 수필(隨筆)은, ‘일정한 형식이 없이 체험이나 보고 느낀 것을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써 나가는 산문의 하나’다. 그런데 ‘수필분과’가 없는 문학단체가 대한민국에 있다. 자유스럽게~, 통제받지 않고~ 쓰게 해서는 아니 될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일까. 아님, 자유분방한 수필 장르가 그들 단체의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일까. ‘상황연극’ 등 특히 ‘보여주는 문화예술 장르’ 즉, ‘결과를 설정’해 놓고 대본을 맞춰 쓸 수 밖에 없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음을 이해하고도 남지만, 지금도 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예술인이고 문학하는 사람이라고 자칭 할 수 있겠는가. 문학, 예술의 기본바탕은 자유정신일진대~, 그들은 통제받기를 즐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가두리 양식장 내부 시설이 천국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울타리 안의 통제 시스템이 ‘유토피아’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울러,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거나,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유구무언 질기게 참아 낸 또 다른 이름의 문학단체는 방조자였나 아님 방관자였나. 그것도 아니면 필자만 알고 있었단 말인가. 경인년을 살아가면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자연산이란 말 속에는 ‘순수’ ‘자유분방’ ‘개성’ ‘신선’ 등의 의미가 있지만 ‘경쟁’ ‘적자생존’이란 의미도 내포돼 있다. 다만, 이들에게도 ‘무리’가 있다.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는 자연산들의 닮은꼴들의 무리, 즉 자유인들의 모임이다. 지금 자유인들은, 국가 간 무한 경쟁시대의 한 복판에서 대한민국의 굳건한 발전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디자인 하는 일에 진정을 다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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